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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누] 100일

2015. 3. 7. 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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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누

2014. 12. 6.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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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에쿠로] 마피아 (전력 60분)

 

 

 

 

* * *

 

 

 평평하던 초록 그물망이 경쾌한 타격음 후에 큰 물결로 출렁거렸다. 곧이어 아득히 멀어져 떨어지는 하얀 골프공. 배불뚝이 남자의 웃음소리 뒤로 여러 아부들이 터져나왔다. 회장님, 나이스샷입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회장이라 불린 자는 자신의 몸만큼 기름진 웃음을 지으며 캐디의 엉덩이를 노골적으로 주물럭거렸다. 이게 다 미스 캐디 덕분이지. 어이구, 예뻐라 예뻐. 남자의 손을 뿌리치려는 캐디의 움직임을 주위 부하직원이 제지시켰다. 회장님 심기 건드려 좋을 게 뭐 있나, 하는 무언의 협박. 어쩔줄 모르고 꿈지럭거리던 여자는 수치심으로 달아오른 얼굴에 결국 억지 웃음을 띄우고 만다.

 

 놀고들 있네. 아주 개판이야 개판. 리에프는 어느새 마지막 개피밖에 남지 않은 담뱃갑을 보며 좀이 쑤시는 것을 느꼈다. 명령을 내려야할 자신의 직속 선배인 쿠로오는 그저 조용히 앞만 주시하고 있을 뿐이다. 인원도 충분하고, 무기도 챙겨왔으며 타이밍도 괜찮은 듯 보이는데 무엇이 그를 망설이게 하는지 잘난 옆태를 뚫어져라 응시해도 도통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아무튼 매사에 지나칠 정도로 신중한 사람이다, 생각하며 다시 담배를 피우려는 순간 조용한 명령이 떨어졌다. 우루루 뛰어가는 막내들의 발소리에 어울리지 않게 놀라 손가락 사이에 끼운 담배 개피를 놓치고 말았다. 아씨……, 돗대인데! 부루퉁한 얼굴로 쿠로오를 쳐다보니 아무 말 없이 턱짓으로 가, 한다. 예고 좀 해주세요 선배……. 여전히 풀리지 않은 표정으로 옆에 놔두었던 골프채를 집어들고서 발걸음을 옮긴다.

 

 궁시렁궁시렁, 어린애가 불평하듯 투덜거리던 입이 곧 무거운 일자로 꾹 다물어졌다. 곧이어 느릿하게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여유로히 새어나오는 강자의 목소리. 확연한 우위선점. 재미없는 수평선을 그렸던 입술이 절로 말려 올라간다.

 

 

 "회장님ㅡ, 재미 좋아? 우리랑도 한판 칩시다. 응?"

 

 

 딱! 정확히 중앙을 맞은 골프공이 멀리 날아갔다. 딱,딱,딱. 곧이어 들리는 둔탁한 타격음은 공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등뼈를 후려맞은 회장 쪽 부하직원들이 괴로운 소리를 내며 자리에 주저 앉았다. 저쪽에서 고용한 경호원들은 이미 발을 묶어둔 상태였다. 형식적인 웃음소리가 만발했던 골프장이 순식간에 일촉즉발의 긴장 상태가 되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덜덜 떨고 있는 캐디에게 리에프는 입고 있던 정장 자켓을 벗어 덮어주었다. 언뜻 보면 상냥한 행동이었으나, 입밖으로 나온 말은 역시나 날이 서있었다.

 

 

 "아가씨. 이거 짭새한테 찌르면 안돼? 예쁜 얼굴 갈리기 싫으면 닥치고 있는게 좋아. 알겠지?"

 

 

 울며 끄덕이는 여자를 뒤로하고 리에프는 골프채를 등 뒤로 돌려 늦은 준비운동 자세를 취하고서 회장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배 나온 회장은 겁에 질린 채로 횡설수설에 정신이 없어 그렇지 않아도 보기 좋지 않은 꼴이 더욱 눈꼴시렸다. 진짜, 가까이에서 보니까 더 좆같이 생겼네 이 아저씨. 불쾌해진 리에프가 혈흔이 묻은 골프채 머리로 회장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느긋함이 골프채 끝에 몰려 다독이는 모습처럼 보인터라, 그 언밸런스함에 남자는 순간 마지막 긴장이 모두 풀려 몸이 축 내려 앉았다.

 

 

 "깔끔하게 한방에 뒈집시다."

 

 

 퍼억ㅡ. 도끼로 내려찍듯 정확히 관자놀이를 가격한 골프채가 바닥에 떨어졌다. 육중한 몸뚱이도 따라 느리게 쓰러지고 만다. 끝까지 존나게 못생겼네. 습관적으로 주머니를 뒤척이다 담배가 모두 떨어졌음을 상기시킨 리에프가 막내의 담배 개피를 빌려 후련한 끽연을 했다. 골프장 벽 너머로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쿠로오에게 죽은 회장의 머리카락을 잡아 들어올리고 손가락으로 브이 표시를 보여주었다. 돌아오는 것은 단단히 솟아오른 가운데 손가락과 왠지 모를 괴로움으로 일그러진 표정이었다.

 

 

 "시체들 알아서 정리하고 돌아와라."

 

 

 그리고는 홀로 휑하니 자리를 떠난다. ……뭐야, 왜 저러시지. 순간 이유를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리에프를 감싸안았다. 

 

 문득 자신의 잠자리 옆에서 들렸던 오래된 잠꼬대가 생각났다. 그만, 미안해, 내가, 그만해……. 동시에 겹쳐지는 쿠로오의 뒷모습. 최근 그가 직접 손을 쓴 적이 없다는 사실 또한 생각의 수면 위로 상기되었다. 어느새 잔뜩 좁혀진 미간은 엉켜버린 실타래마냥 좀처럼 풀어질 줄 몰랐다. 기분 나쁜 의심이 발 끝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와 리에프를 긁어댔다.

 

 

 자신의 정장을 걸친 캐디는 아직까지 바들바들 떨고 있다.

 

 

 "……저년까지 데리고 와."

 

 

 먼저 떠난 쿠로오는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 * *

 

 

 "선배, 뭐하십니까?"

 

 

 쿠로오의 방문 틈으로 빼꼼 얼굴만 내민 리에프가 괜히 의미 없는 말을 걸었다. 하이바냐. 아직 다 태우지도 않은 담배 개피를 재떨이에 짓이겨버리고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는 모습이 기분 나쁘진 않았다. 리에프는 샐쭉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뭐 가져 왔게요."

 "뭐야, 뭘 가져왔길래 그렇게 신이 났어?"

 "하하, 한번 보실래요?"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뒤에 숨겼던 여자를 끌고 들어와 방바닥에 던지듯 놓아주었다. 아직 골프복에서 옷도 갈아입지 못한 캐디였다. 두 눈이 안대에 가려진 채 두려움으로 장님처럼 바닥을 더듬는 모습이 가련한 꼴이긴 했다. 쿠로오의 얼굴을 살피니 당황스러움을 애써 죽이는 듯 보였다. 리에프는 조용히 의심의 눈초리를 숨기고 쿠로오에게 잘 갈려진 칼을 건넸다.

 

 

 "이년이 우리가 하는 짓을 다 봤거든요. 뒤가 구리면 안되니까, 죽이려구요."

 "……거기서 죽였으면 될걸 뭐하러 데리고 오기까지 했어."

 "선배 요즘 한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감 떨어지실까봐 선배 생각해서 일부러 귀찮은거 참고 끌고왔는데."

 "………."

 "오랜만에 선배 칼솜씨도 보고 싶어서요. 자, 여기."

 

 

 쿠로오는 건넨 칼을 받아들 생각도 않고 잠시 긴장을 꿀꺽 삼키더니 이내 뒷주머니에서 총을 꺼내들었다. 그 모습에 불쾌한 분노를 느낀 리에프가 망설임 없이 여자의 복부에 깊숙히 칼을 꽂아 넣었다. 여린 살갗이 찢어지는 적나라한 소리와 솟구치는 피가 바닥에 흘러 넘쳤다. 날카롭게 내질렸던 여성의 비명소리는 뱃속을 쑤셔 박는 칼날에 갈려 죽어갔다. 손가는대로 마구 찔러대며 흘끗 쿠로오를 쳐다보자 그의 얼굴은 숨김 없는 메스꺼움을 표현하고 있었다. 씨발, 왜 저런 병신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데. 어금니를 꽉 깨물며 혈흔 범벅이 되어 비릿한 쇠냄새를 풍기는 칼을 다시 쿠로오에게 건넸다. 받아, 제발 받아요.

 

 

 "아직 안 죽었어요. 죽여요. 선배가 죽여주세요."

 "윽, 우욱……."

 "저 처음 들어왔던 날 기억하십니까? 선배가 다짜고짜 배때지에 칼부터 쑤셔 넣었잖아요. 이정도도 못 버티면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고. 그 때 그 냉정함은 다 어디로 갔어요? 선배 왜 그래. 저년 하나 직접 못 죽여요?"

 

 

 배에서 빼낸 칼을 이번엔 허벅지에 찔러 넣었다. 여자가 발작하듯 팔다리를 허공에 쭉 뻗더니 고통에 사지를 비틀며 덜덜 떨었다. 그만. 거슬리는 단어가 쿠로오의 목소리를 입은 채로 뱉어졌다. 입 안을 짓씹으며 다리를 도려낼듯 칼질에 박차를 가했다. 그만, 하이바. 떨리는 목소리를 숨길 여력도 없는 듯 꼴나사운 음성이 다시 한번 리에프를 거북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칼을 잡은 손을 멈추지 않자 이내 비겁한 총성이 방 안을 울렸다. 정확히 여자의 심장을 꿰뚫은 총에서 아른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여자는 움직임이 없었다. 확실하고 깔끔한 죽음. 그래, 이제 와서 깨끗한 척을 하시겠다?

 

 

 "병신."

 "………."

 

 

 시간이 갈수록 약함을 내보이는 자신의 우상이 안타까운 동시에 형언할 수 없는 화가 치밀었다. 평생을 뒤에서 받쳐주며 같은 행보를 밟을 생각이었는데. 기괴한 모습으로 죽어버린 여자의 몸뚱이 위를 훌쩍 넘어 방문을 열자 총성에 모여든 부하들이 무슨 일이냐며 열 오른 질문을 해댄다. 입을 다물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대신 방문을 큰 소리가 나도록 세게 닫았다. 움찔하는 부하들의 모습에 웃음이 났다. 아, 얘들아. 우리 형님이 병신이 되었다. 병신 머저리 새끼가……. 속으로 뱉어낸 문장은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지어졌다. 형용할 수 없이 솟구치는 짜증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곧이어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난 쿠로오가 별일 아니라며 휘휘 손을 저어 해산을 시켰다. 뒤로 숨긴 반대쪽 손에는 평소 습관처럼 손에 쥐고 있던 싸구려 라이터의 유리조각이 듬성듬성 박혀 피가 가득 맺혀있는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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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에쿠로] DATE (전력 60분)

 

 

 

 

 * * *


 연구소에는 이름을 잃어버린 자들이 생명 없는 물 속에서 숨을 쉬고 있었다. 품종 XXXXXXX, OOOOOOO…… 형식적인 걸음을 걷던 연구원이 멈춘 곳은 품종 K001117의 캡슐 앞이었다. 태초의 모습, 전라의 형상으로 기계적인 호흡을 하는 입에서 연약한 기포가 둥둥 떠올랐다.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수면 때문에 정확히 보이진 않았지만 왠지 모를 낯익은 느낌이 들어 연구원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차트를 넘기기 시작했다. 역시나 공백인 과거의 인적사항. 의아함에 고개가 살짝 옆으로 기울어진다. 캡슐 안의 실험체를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내딛은 한 발자국이 미처 바닥에 닿기도 전 일순간 잡힌 머리채에 그는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나동그라진 모습으로 고개를 들자 커다란 시선이 내리꽂아진다.

 

 

 "……이 품종은, 저를 제외한 어떤 사람도 건드리지 말라고 했을텐데요."

 

 

 무심한 얼굴이 서늘한 빛을 띄었다. 리,리에프. 미안해, 죄송합니다. 바닥에 흩어진 차트 속의 종이들을 정리하고 서둘러 몸을 일으키고 꾸벅 허리 숙여 사과를 한다. 나이 어린 자신에게 존댓말까지 써가며 덜덜 떨어대는 꼴이 우스워 리에프는 소리없는 비소를 그렸다. 얼빠진 연구원이 지나간 자리에는 자신 홀로 덩그러니 남았다. 탁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불투명한 캡슐 곡면에 살짝 손을 대니 얼음장 같은 차가움만이 손 끝에 고인다. 저 안은, 추울까? 늘 붉었던 입술은 퍼렇게 질려버렸을까? 헤아릴 수 없는 예상이 유리 곡면을 타고 흘러내렸다. 

 

 

 "쿠로상, 기다려요.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어."

 

 

  곱씹는 독백에서는 달큼한 맛이 났다.

 

 

 

 

 * * *

 

 

 불법 실험을 단속하기 위해 내려온 경찰들과 격렬한 육탄전을 벌이고 있는터라 늘 손에 쥐고 있었던 딱딱한 차트 대신 연구원들은 총을 들었다. 얌전하게 입은 흰 가운에 사나운 피가 튀겨 점점 붉게 물들어간다. 정적이었던 연구소에는 낯선 총성과 비명이 오고갔다. 말 그대로 처음 겪는 아비규환이었다.

 

 어지러운 공간을 손 쉽게 가로지른 리에프는 품종 K001117의 캡슐 앞에 우뚝 섰다. 가동되는 기계를 멈추고 자신만이 알고 있는 암호를 입력해 기나긴 실험의 완성품을 밖으로 꺼냈다. 깨끗한 흰 가운을 덮어주고 아직은 익숙하지 않아 비틀거리는 걸음을 도와주었다. 적응이 되지 않은 탓에 멍청하게 벌려진 입술 색깔은 추위에 질려 푸른 빛을 띄고 있었다. 떨고 있는 그 위로 자신의 입술을 포개어 벌어진 틈 속에 뜨거운 숨을 깊게 불어넣었다. 당황함에 뒤로 도망가는 혀를 잡아 옭아매고 온기 어린 타액을 목구멍 뒤로 넘겨주자 미처 삼키지 못한 투명액이 입꼬리 끝에서 흘러내린다. 입술의 주름을 하나하나 핥듯이 쓸어내리던 유연한 혀를 빼내고 리에프는 짐짓 해사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 아으…. 아직 녹지 못한 언어는 뱉어지지 못하고 웅웅거린 채 그의 입안에서 맴돌 뿐이었다.

 

 

 "리에프, 상황 종결이다. 완성품은?"

 "여기, 코드번호 K001117. 이름은 쿠로오 테츠로. 이 연구소에서 가장 영민한 연구원이었습니다."

 "한명 뿐이야? 다른 건?"

 "폐사시켰습니다. 통 진전이 없더라구요. 오늘 죽은 연구원들도 모조리 아둔한 놈들 뿐이니 그대로 불태우셔도 됩니다."

 "그 긴 시간동안 나온 결과물이 단 하나뿐이라니……."

 "그만큼 질이 좋으니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정 물량이 달리면 복제품을 만들면 되는 것이고요. 원본을 그대로 따라가진 못하겠지만."

 

 

 흰 가운 위에 두터운 담요 하나가 더 덮어지고 덜덜 떨리던 쿠로오의 몸이 점차 진정되며 차분함을 찾아갔다. 잠시 시끄러웠던 연구소 또한 살아있는 자들의 발소리 외에 죽은 듯이 조용한 공간이 되었다.

 

 

 

* * *

 

 

 [DATE: 20xx.11.17]

 쿠로상, 오늘이에요. 드디어 그 날짜가 다가왔어.

 

 

 긴 시간의 가시를 삼킨 리에프의 목구멍에 후련한 따가움이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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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에쿠로] 죽음 (전력 60분)

*마피아AU

 

 

 

 

 * * *

 

 

 "ㅡ그래서, 즉결처분하라는 명령이……."

 

 

 더이상 이어지지 못한 뒷말은 둔탁한 타격음으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리에프는 감히 자신의 애인 위에 죽음을 언급하는 하부 조직원의 뺨 위로 주먹을 꽂아 넣었다. 즉결처분? 웃기지도 않은 소리. 미처 가시지 못한 화가 속에서 들끓었다. 표출할 곳만 있다면 주위 시선 신경쓰지 않고 이대로 미친듯 날뛰고 싶었다. 위에서 전해진 사실은 밑바닥 시절부터 함께한 제 애인이 타 조직의 프락치였다는 것이었고, 그 결과로 한치의 인정도 용납되지 않는 죽음을 말하는 명령이 떨어진 탓이었다.

 

 씨발, 진짜, 개소리 하지 말라 해……. 분노는 곧 초조함으로 변해 뭉툭한 손톱이 입술 안에서 뚝뚝 물어뜯겼다. 자신의 괜한 화풀이로 나가떨어진 조직원이 비틀거리며 죄송하다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형님들께서……. 잔뜩 움츠린 목소리로 우물거리는 그 모습에도 짜증이 났다. 다시 버럭 화를 내려다 이내 엉망이 된 머릿속을 진정시키듯 관자놀이를 엄지손가락으로 꾹 눌러 빙빙 돌렸다. 뭔가 잘못되었다. 위에서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말들은 리에프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상부에서 죽이고자하는 그는, 누구보다 가까이 있던 자신의 동료였고 연인이었다. 그러니 더더욱 내 눈으로 직접 보아야지.

 

 

 "형님들께 갈테니 앞장서라."

 "리에프 형님, 그게,"

 "방해하지 말고 문 열라고 새끼야!!"

 

 

 결국 참지 못한 발이 먼저 나가버렸다. 쾅,하는 굉음과 함께 회의실의 철문이 고장난 기계처럼 녹슨 소리를 내며 늘어졌다. 설득시켜야해, 형님들을 설득해야……. 하지만 성급하게 내딛은 발걸음은 그 긴박함과 어울리지 않게 금방 멈추어버리고 말았다.

 

 

 "리에프, 마침 잘 나왔다. 그 개새끼가 냄새를 맡은건지 벌써 지 조직으로 꽁무니를 뺐단 말이지. 여기 있는 놈들 다 따라와. 다 조져버리러 갈 참이니까."

 

 

 뒤에서 들리는 조직원들의 우렁찬 대답에 다릿심이 풀릴 것 같았다. 쿠로상, 아니죠. 초점 잃은 눈은 어느새 총을 챙기는 자신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검은 다리들을 따라가고 있었다.

 

 

 

 

 * * *

 

 

 정신을 차려보니 쿠로오와 자신은 서로 총구를 겨냥한 채 맞닿아 있는 상태였다. 아무래도 주요 표적이 되었던 탓인지 이미 수차례 찔린 상처로 그의 몸은 새빨간 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죽지 않은 눈빛에 리에프는 속에서 울컥 솟은 그리움과 진한 원망을 느꼈다. 이렇게 그대로인데, 왜 쿠로상은 거기에 있어요. 둘을 경계삼아 나눠진 조직원들이 그 긴장감에 숨을 죽였다. 쿨럭, 피를 한가득 토해낸 쿠로오가 그의 상황과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 여유로운 웃음과 함께 빈 손을 들어 잠시 긴장을 제지했다. 잠깐, 리에프.

 

 

 "총을 잘못 들었다. 잠깐 바꿀 시간 좀 주겠어?"

 

 

 무언으로 대답을 대신하자 쿠로오는 들어올린 빈손으로 주위를 경계하더니, 이내 리에프의 이마에 겨누어졌던 총을 떨어트리고 뒷주머니에서 새로운 총을 꺼냈다. 탄환이 다 떨어졌으니 새로운 총으로 바꿔 든 생각처럼 보였다. 진심이구나, 날 죽일 생각이야. 씁쓸한 분노를 씹으며 총구 뒤의 레버를 꾹 눌러 당겼다. 순식간에 식은 화가 체념으로 변한 순간이었다. 철컥, 하는 소리는 두 사람에게서 동시에 났다. 잠시나마 엉망이 된 그의 몸을 걱정하며 지금이라도 병원에 가면 살 가망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자신에게 자조적인 웃음이 지어졌다. 대체 몇 년동안 병신이었던거지, 나는.

 

 

 "리에프."

 "……쿠로오, 이 개새끼야."

 "원망해라."

 

 

 타앙ㅡ. 격발된 총은 쿠로오의 것이었고, 총알에 관통당한 머리 또한 그의 것이었다. 둘을 에워싸던 긴장감이 작은 폭발음과 함께 무너짐과 동시에 서로의 조직원들은 다시 벌레들처럼 징그럽게 얽히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서 점차 붉게 물들어가는 얼굴을 흰색 와이셔츠로 닦아내던 리에프가 마지막 유품이라도 챙기듯 쿠로오의 총을 손에 쥐었다. 혈흔을 빼면 말끔하기 그지없는 새 총. 철컥, 바람 빠진 소리를 뱉어낸 그것은 아무런 격발음도 들리지 않는 텅 빈 무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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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에쿠로] 죽음 (전력 60분)

*악마X신부

 

 

 

 

 * * *

 

 

 아득하게 넓은 하늘이 짙은 주홍색 선혈로 물들어버린 늦저녁이었다. 커다란 유리창 사이로 조각난 붉은 빛줄기가 고요한 예배당을 다소곳하게 비추고 있었다. 무대의 조명이 중앙으로 집약되듯 점차 모여든 빛이 예배당 중심에 꼿꼿이 서 있는 검은 사내를 점차 붉으스름하게 밝혔다. 목 끝까지 채워진 단추, 단정한 검은 사제의 옷을 입은 채 얌전히 묵주를 쥐고 있는 단단한 손. 기도를 올리는 듯 사내는 한동안 어떤 움직임도, 소리도 내지 않았다. 성인(聖人)처럼 평화로웠던 얼굴은 시간이 지날수록 다가올 무언가를 피하려는듯 자꾸만 긴장이 서렸다. 감긴 눈은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담아 뜰 생각을 못하고 조용한 공간에서 홀로 파르르 떨어댔다. 곧이어 신과의 엄숙한 대화가 마무리 지어진 듯 굳게 다물어 팽팽한 눈꺼풀을 조심스레 들어올리면, 오늘도 어김없이 피로 물든 십자가가 보였다.

 

 가시 면류관에 열매같은 피가 맺혔다. 토막난 채 새어들어오는 빛줄기와 비교도 되지 않는 뚜렷한 붉은색, 예배당 중앙에 걸린 십자가가 그 빛에 흠뻑 젖어들어간다. 곧이어 들리는 적나라한 비소. 이 까무러칠 상황은 비웃음의 주인이 벌인 지독스러운 장난이었다.

 

 

 "안녕, 오늘도 왔네요."

 

 

 ㅡ끈질기게. 마지막 말에 숨김 없는 서늘함이 담겼다. 더이상은 용인할 수 없다는 절대자의 선고와 비슷한 무게감이었다. 덕분에 쿠로오는 하마터면 구명줄을 붙잡듯 손에 꾹 쥐고 있던 묵주를 볼썽사나운 소리와 함께 떨어트릴 뻔 하였다. 몇 일동안 이어진 질 나쁜 장난은 볼때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역겨운 장면이었다. 사람이었다면 죄를 뉘우치게 하여 이 자리에서 신에게 용서을 빌고 교화를 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이 놀음놀이의 당사자는 인간이 아니었다. 자신의 두려움이 만들어낸 환상인가, 또는 신이 내린 시험? 온갖 번뇌로 가득한 머릿속에 순간 깊은 음성이 박혔다. 코 앞으로 성큼 다가온 백색 망령의 서느런 목소리였다.

 

 

 "ㅡ있잖아요."

 "………."

 "테츠로. 아니, 쿠로상. 죽음이 그렇게 무서워요?"

 "……그 쪽이 누군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장난질은 이쯤 하고,"

 "매번 찾아오지 말라 경고해도 끈질기네요, 짜증나게. 신이 정말 죽음으로부터 당신을 구할 수 있을거라 생각해요?"

 "신을 모독하지마. 그는 망령 따위인 네 입으로 평가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고."

 "웃기지도 않은 소리. 내가 망령이면 신은 실재하지도 않는 망상이야."

 

 

 순간 강하게 조인 목줄기에 쿠로오가 숨이 끓는 소리를 내었다. 끄으, 윽……. 말도 되지 않는 악력에 붙잡힌 숨통 위로 선명한 핏줄이 불거져 나왔다. 금방이라도 꺾이거나, 터져버릴 것 같았다. 으윽, 커헉. 손을 뻗어 그의 악력을 제지하려 했지만 잡히는 것 없이 더욱 괴로워질 뿐이었다. 보이는 것은 뱀처럼 살기어린 눈동자 뿐. 영민한 독사가 아둔한 짐승을 사냥하듯, 혹은 가르치듯 날카롭고 여유로운 시선이었다. 본능적인 몸부림 때문에 손에 쥐었던 묵주는 바닥에 떨어져 나뒹군지 오래였다. 끝까지 수그러들지 않고 죄여오던 힘이 일순 빠져나가자 쿠로오는 목 끝까지 잠구었던 단추를 다급하게 뜯어내고 뛰쳐나오는 거센 호흡을 가감없이 내뱉었다. 그 모습에는 엄숙함도, 거룩함도 일체 보이지 않았다. 신자이기보다 죽음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벗어나고자 하는 평범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살고 싶었죠."

 "커헉, 허억, 헉……."

 "내 손에 죽어도 쿠로상은 신의 곁으로 갈텐데 왜 그랬어요. 얌전히 죽어버리지."

 "너,는. 대체 누구……."

 "신은 없어요. 죽음으로부터의 구원 또한 없어. 쿠로상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잖아요."

 

 

 아득한 정신을 고쳐잡기 위해 쿠로오는 고개를 두어번 좌우로 저었다. 호흡이 통하지 않아 어둑했던 시야가 점차 붉었던 예배당의 색을 입었다. 마치 긴 악몽에서 깬 듯 현실감 없는 장면이었다.

 

 눈 앞에 있던 질 나쁜 망령의 백색 머리칼이 검은색이 되고, 녹빛 눈동자는 꾸덕한 갈색으로 변했다. 그는 타락한 혼령의 모습으로 자신을 비추고 있었다. 쿠로오는 그 광경에 소스라치도록 놀라 예배당 의자위로 꼴사납게 넘어졌다. 검게 늘어져 몰아쉬는 숨은 죽음의 냄새가 가득 배여 독한 악취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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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에쿠로] 제복 (전력60분)

*부제 : 개

 

 

 

 

 * * *

 

 
 쿠로오 테츠로가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좁디 좁은 사각형의 벽면이었다. 겨우 제 몸만을 수용하는 공간은 형무소 독방을 닮았고, 자신은 그곳에 수감된 죄수와도 같은 꼴이었다. 자신의 처지를 재인식 시켜주듯 무의식적으로 움직인 팔에서 쩔그렁하는 낡은 쇳소리가 났다. 동시에 쇠사슬에 치인 빈 그릇이 커다란 벌레들의 시체가 거뭇한 껌딱지처럼 붙어있는 바닥을 짧게 가로질러 굴렀다. 애완견의 사료를 담을 때나 쓰이는, 개 밥그릇이었다.

 

 씨발. 대체 날 뭘로 보는거야. 무릎을 꿇고 있던 터라 저리기 시작한 다리를 움직여 힘겹게 고쳐앉으니 또 한번 쩔그렁, 소리가 난다. 목재가 낡아 바닥에서 피어오른 나무 조각에 쓸린 맨 다리가 짐승이 할퀸듯한 자국으로 엉망이 되었다. 쓰린 아픔과 수치심에 욕지거리가 절로 튀어나오는 입술이 험상궂게 일그러진다. 이런 엽기적인 일을 벌일만한 작자는 자신의 빌어먹을 연인놈 밖에 없었다. 하ㅡ, 정신나간 새끼.

 

 이별을 고했던 몇 주 전, 찌질할 정도로 울며 자신에게 매달렸던 허여멀건한 머리통이 생각났다. 쿠로상, 가지마요. 나는 쿠로상이 없으면 안돼ㅡ. 순수해서 더욱 무서웠던 절실한 애원을 가까스로 뿌리쳐 드디어 그에게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대가는 평화가 아닌, 단지 잠복기를 거쳐 비로소 오늘 그 본모습을 드러냈을 뿐이었다. 더욱 처절해진 집착의 모습을 하고서.

 

 

 어디선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을 렌즈를 쿠로오는 본능적으로 찾기 시작했다. 좁은 공간이었기에 천장 귀퉁이에 박혀있는 둥그런 카메라 눈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온 힘을 다해 노려보자 협소한 공간에 큰 음성이 울렸다. 아이와 같은 커다란 웃음 소리였다.

 

 

 "일어났어요, 쿠로상?"

 "……리에프. 이게 뭐하는 짓이야."

 "너무 오래 자서 조금 무서웠다구요. 늦게 일어나셨네."

 "너, 이자식……!"

 "나 괜히 걱정했잖아요. 설마 쿠로상이 그정도 약에 죽을 사람이 아닌데 말이야."

 "………."

 

 

 기가 막혀 수 많은 음절들이 그저 입 안에서 뭉게져버렸다. 그나마 밖으로 빼낸 것은 공허한 헛웃음 뿐이었다. 자신의 연인, 정확히는 연인이었던 하이바 리에프가 이곳과는 다른 어딘가에서 저를 보며 즐거워하는 모습이 불을 보듯 뻔히 그려져 아무것도 입혀지지 못한 몸에 소름이 돋았다. 인정이 없어 차가운 그의 백색 머리칼이 닿은 것처럼 순간 한기가 느껴졌다.

 

 

 어라, 추워요? 기다려요.

 치지직ㅡ. 날개 달린 벌레가 죽기 전 내뱉는 소리와도 비슷한 기계음이 볼썽사납게 찢어졌다. 곧이어 들려오는 급박한 발소리. 문턱에서 잠시 멈춘 발이 성큼, 자신의 앞으로 다가왔다. 끼익 늘어진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히고 공간은 자신과 리에프 단 둘만으로 가득 찼다. 

 

 리에프는 헐레벌떡 차오르는 숨도 고르지 않은 채 손에 들린 우스꽝스러운 옷을 보여주었다. 뿌듯한 얼굴, 부드럽게 말려 올라간 입가의 호선. 예쁘죠? 내가 만들었어요.

 

 몸통에서 뻗어나온 팔 소매는 두개가 아닌, 네개였다. 움직일 수 없는 자신을 빤히 내려다 보더니 눈대중으로 대충 옷을 맞춰보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만족스러운 미소. 가히 미친 사람의 모습이었다.

 

 

 "쿠로상 생각하면서 만든 옷이에요. 하이바 리에프 표 제복."

 "……당장 치워, 이 정신나간 새끼야."

 "마음에 안 들어요? 아, 목줄도 채워야 하는거였어. 그래야 정말 내 개에게 어울리는 제복인데 말이에요. 깜빡했다."

 

 

 멀리 굴러가지도 못한 개 밥그릇이 리에프의 손에 들린 채 자신의 앞으로 다시 돌아왔다. 처음 겪는 수모와 공포로 떨구어진 고개가 단 한개의 손가락에 이끌려 미세한 떨림과 함께 점점 위로 들렸다. 그 끝은 주인이 애완견을 대하듯 부드러운 동시에 한 치의 여지도 없는 권위적인 키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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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에쿠로] 감기 (전력60분)

 

 

 

 

 * * *

 

 

 평범했던 방 안 공기가 물에 젖은 솜 덩어리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천장이 절반 정도 푹 꺼진 듯 답답한 공간으로 변질되어간다. 방은 잘못한 것이 없는 자리였다. 다만 그 안에 존재하는 사내의 존재가 쿠로오의 전신을 둔중한 울림으로 괴롭히고 있었다. 하이바 리에프.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의 발걸음이 큰 것이 아니었음에도 호흡이 막힌 듯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른다. 마치 독감에 걸린 것처럼, 온 몸이 열뜨고 숨들이 아팠다.

 

 

 "……쿠로상, 괜찮아요?"

 

 

 자신 앞으로 뻗어진 곧은 손가락을 과민반응 하듯 쳐냈다. 본능이 알려줄 자신의 존재를 리에프는 아직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렇게 태연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손을 건넬 수 없다. 힘에 부쳐 이대로 입을 열면 발정하는 숨 덩어리들이 터져나올 것 같아 부러 입술을 짓씹으며 버텼다. 주장이나 되어서는 부 활동 후배에게 이런 꼴사나운 모습을 들킨 것도 모자라 필사적으로 숨겨왔던 본래의 정체까지 들킨다면 그 수치심에 정말로 죽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열꽃이 피어오르는 얼굴을 떨궈 감추고, 급한대로 주위에 널브러져 있는 퍼런 매트를 주워 몸을 감쌌다. 그리고는 점점 가까워지는 그에게 무언 속 간절함을 담은 손사래짓을 했다. 가, 제발, 못 본척 지나가줘라.

 

 

 "……쿠로상 혹시,"

 "………."

 "오메가에요?"

 

 

 아……. 자신도 모르게 맥이 풀린 멍한 목소리가 나왔다. 참았다 터트린 얇은 숨결은 자신이 느끼기에도 열이 오른 달큰함이 배어있었다. 어느새 코 앞에서 마주하게된 리에프는 의중을 알 수 없는 표정과 함께 느린 시선으로 얼굴을 훑어내렸다. 괜한 긴장감에 까끌한 침을 꿀꺽 삼켜낸 울대 안이 목감기에 걸린 듯 쓰려왔다. 바싹 말라오는 건조한 혀는 하얀 알약을 통째로 씹어댄 것처럼 텁텁한 맛이 느껴져 쓰다. 들끓는 속도 모르고 리에프는 그 얼굴을 자신의 어깨에 턱하니 걸쳤다. 순간 볼에 스친 하얀 머리칼이 예민한 촉감을 문지르는 탓에 되려 제 몸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약, 없었죠."

 "………."

 "내 감기약인 줄 알고 잠깐 가져갔었어요. 약봉지에 담긴 것까지 모양이 하도 똑같아서."

 "너, 당장, 이리 돌려놔."

 "싫어요."

 "좋은,말로 할때…, 가져와."

 "정 뭣하면 내 감기약이라도 드시던가."

 

 

 

 결코 여리지 못한 굳쎈 목덜미가 물린 것은 한순간이었다. 목 뒤에는 백색 짐승의 잇자국이 깊게 새겨질 터였다. 그 깊은 자국이 난 길을 따라 파다한 알파의 향이 자신을 파고들어, 한낱 오메가인 몸은 지독한 감기에 걸린 것 마냥 높은 열이 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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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빙] 무제 (조각글)

 

 

 

 

 * * *

 

 

 걸음을 움직일 때마다 발 끝에 채이는 모래 바람에 뿌얘진 시야를 손을 들어 휘휘 내저었다. 당장 길거리로 내쫓길 꼴이라 어쩔 수 없이 향한 공사판이었지만 첫인상부터가 영 텁텁해 좋지 않다. 커다란 손으로 간신히 정리한 시야에는 자신보다는 작지만 덩치 좋은 장정들이 어깨 위에 하나 둘 그들의 몸만한 돌덩이들을 이고 땀을 흘리는 모습이 보였다. 모래 날리는 건조한 주위 환경과 다르게 다들 자신의 체액에 절어 푹 젖은 꼴이었다.

 

 으으, 완전 최악. 아츠시는 장정들이 흘리는 땀이 구정물이라도 되는 것 마냥 불쾌한 감정을 한치의 여과없이 얼굴 위로 드러냈다. 유쾌하지 못한 광경들을 구겨진 표정으로 지나친 후 배정 받은 자리에 도착하니, 자신을 맞이하는 것은 그늘 아래서 태평하게 축 늘어져있는 한 사내였다. 이 시끄러운 공간 안에서도 미동 하나 없는 것이 꼭 죽어버린 시체 같다. 문득 공사판이 무수한 안전 사고가 빈번히 발생하는 곳이라는 지나가는 말이 상기되었다. 다른 사람들도 많건만 괜히 가까이 다가가 힘 없이 뻗은 사내의 다리를 잠든 사람을 깨우듯 먼지 묻은 운동화 끝으로 툭툭 쳐댔다. 일어나구. 첫 날부터 죽은 사람을 목격하고 시작한 노동은 불길한 징조가 아닌가하는, 일종의 미신에서 동한 행동이었다.

 

 

 "……뭐야…."

 

 

 몽롱한 표정으로 나른하게 들어올린 얼굴은 그마저도 한 쪽이 긴 앞머리에 가려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내리쬐는 태양 빛에 눈이 부신건지, 아니면 그저 나사 하나가 빠진 몸 상태인건지 온통 초점이 엇나간 몰골이다. 대충 봐도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 같았다. 새로 왔구, 히무로 타츠야가 누구야? 그 말에 사내는 술에 취한 듯한 한숨을 빼내더니 이내 툭 떨어트린 고개 끝에 웃음을 걸었다. 네가 아츠시구나아……. 비틀거리며 일어난 상체가 미처 고정되지 못해 여전히 흔들리는 채로 악수를 했다. 좀 더 가까이서 본 사내의 얼굴은 볼이 패여 수척했고, 심지어 코 밑은 헐어있기까지한 볼썽사나운 모습이었다. 그가 입을 열 때마다 빠져나오는 숨에서는 독한 냄새가 났다. 그리고 계속 뭉게지는 발음. 가녀린 몸 선과 다르게 영 어울리지 않는, 넝마와도 같은 몰골이었다.

 

 

 "……그, 일은, 잘 하겠네에. 키도 크고. 덩치도 좋고…."

 "정신 좀 차리구,무로칭. 꼴사나워."

 "으응, 성격이 못 됐네, 성격이. 거기, 그냥 이것저것 나르면 되니까 알아서 해…. 아, 위에서 자재들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조심…, 하고ㅡ."

 

 

 그리고는 쓰러질 듯이 어깨를 툭툭 쳐대고는 정리되지 않아 꼬인 발걸음으로 자신 옆을 휑하니 지나친다. 불안한 걸음걸이를 따라 흔들거리는 팔 끝에는 매듭 지어진 비닐 봉지가 들려 있었다. 속이 다 비치는 투명한 비닐 안, 두꺼운 거미줄처럼 끈덕지게 달라 붙어 있는 누런색의 액체.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히무로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불안정하게 서더니 얽힌 손으로 힘겹게 비닐 봉지의 매듭을 풀기 시작했다. 자꾸만 빗나가는지 아, 씨발, 따위의 욕지거리를 뱉던 입술이 곧 둥근 선을 그리며 말려 올라갔다. 볼품없이 푸석한 얼굴에 순간 붉그스름한 생기가 도는 듯 했다. 아가리를 벌린 비닐 속의 기체가 바깥 모래 공기와 섞일세라 히무로는 급히 얼굴을 그 안으로 처박았다. 깊이 들이마신 호흡에 투명 비닐이 말라 비틀어지듯 그의 얼굴에 쩍하고 달라붙었다. 곧이어 길게 빼낸 날숨은 찌르르 전율하는 몸짓과 깊게 혹한 얼굴이 함께였다. 땀냄새를 풍기며 바삐 움직이는 노동자들 사이로 히무로는 혼자만의 황홀경에서 헤매이고 있다. 먼지 날리는 공사판에서는 볼 수 없는 장면, 쾌감으로 가득찬 신음소리를 내뱉고 있을 것만 같은 야살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반복적인 깊이 있는 들숨과 날숨에 히무로의 얼굴을 삼킨 비닐이 마른 육지 위 어류의 아가미처럼 헐떡였다. 흐으,흐……. 곧이어 그는 정말로 신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자신의 집 앞 불청객인 도둑고양이가 발정했을 때 터트렸던 울음과 닮은 소리였다. 그 속 끓는 얼굴은 처음에 느꼈던 찌들고 흉한 몰골과는 다르게 새로이 아츠시만의 황홀경으로 다가왔다. 

 

 

 히무로의 상이 비닐 속 누런 본드처럼 천천히, 진득하게 녹아내린다. 아츠시 자신 또한 환각 증세를 겪는 듯 어른거리는 눈동자가 모래 바람에 먹혀 온통 노랗게 침잠하는 시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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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에쿠로] 무제 (조각글)

*마피아AU

 

 

 

 

 * * *

 

 

 격전이 일어난 곳은 찾는 사람이 없어 폐허가 되어버린 허름한 당구장이었다. 둥그런 공들이 굴러다녀할 당구대 위에는 그 대신 피 칠갑이 되어버린 검은 정장을 입은 시체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다. 그렇지 않아도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터라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은 공기는 피 비린내와 시체 썩는 냄새가 섞여 더욱 고약한 모습으로 진동했다. 공간은 죽음만이 가득해 한 없이 정적이었다. 고요함의 중심에는 툭툭, 하고 죽은 남자들을 건드리는 리에프의 구두 소리 만이 존재했다. 이리저리 채이는 시체들은 자신의 발 움직임에 따라 힘 없이 움직일 뿐이다. ……다 뒤져버렸네. 종이 위로 상황 정리를 하던 리에프의 손 끝에 따분함이 묻었다.

 

 재미 없다는 듯이 느린 발걸음을 돌리려던 찰나, 발 뒷쪽에 차갑고도 낯선 느낌이 닿았다. 정확히는 예민한 아킬레스 건 중앙. 살짝 고개만 뒤로 돌려보니 엉망이 된 바닥에 엎드린 채 간신히 총을 잡고 있는 한 사내가 보인다. 거긴 쏴도 안 죽는데ㅡ. 여유로움이 한껏 담긴 웃음을 지으며 조롱하는 투로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조그만 권총 하나 격발할 힘 조차 없어보이는 불쌍한 꼴이었기에. 보기 흉하게 덜덜 떨리는 손이 우습다. 겨냥 당한 발을 들어 망설임 없이 그 손 위에 올리고 짓이겨댔다. 뼈가 서로 엇갈리며 우득거리는, 꽤 아픈 소리를 내고 있음에도 비명 한번 지르지 않는다. 그저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윽윽거리는 둔중한 울림만을 내뱉을 뿐. 평소 같으면 무심한 얼굴과 함께 권총으로 뒤통수를 터트렸을텐데, 오늘은 죄다 재미없는 사체들 뿐이어서 그런지 유일한 생존자인 이 남자에게 괜한 흥미가 동했다.

 

 

 "운이 안 좋네, 당신."

 

 

 장난감을 갖고 놀듯이 유연하게 움직이던 구둣발이 결국 사내의 손가락 몇개를 뒤로 꺾어 부러트렸다. 그제야 큰소리를 내는 입이 고통으로 일그러진다. 어두운 공간에 동화된 검은 머리칼을 휘어잡고 뒤로 젖히자 예상보다 사나운 얼굴이 보였다. 잔뜩 구겨진 표정이지만 왠지 모를 질서가 담겨있는 얼굴이었다. 탈선이라고는 엿볼 수 없는 곧은 일직선, 흔히 말하는 충신과 같은 모습. 그 전체적인 형상이 리에프의 악취미에 불을 당겼다. 비뚤어진 수평선마냥 위태롭게 닫힌 입술에서 살려달라는 애원어린 말이 듣고 싶어졌다. 자신에겐 별 의미도 없는 절실한 희망고문 후 싹 돌변하여 가차없이 죽여버리는 일. 생명을 배신당한 절망감이, 그때 보이는 마지막 표정이 끝내주거든.

 

 

 "죽,이려면, 어서, 죽여……."

 

 

 그런데 이 사내는 자신의 생명을 그리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모양이다. 괜한 객기로 부리는 허세가 아닌, 바람 새는 웃음과 함께 살인을 도발하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아아, 이러면 재미 없잖아 형씨. 눈 높이를 맞추기 위해 다리를 굽히고 좀 더 자세히 그 얼굴을 살폈다. 총구 하나 심장에 제대로 겨눌 기력조차 없었던 주제에 핏발 선 눈은 죽을 줄 모르고 더 날을 세운다. 그 독살스러운 모습에 어이 없는 실소가 터져나왔다. 목숨 소중한 줄 알아야지, 아무리 파리 같은 명줄이라 해도 말야.

 

 

 "언제까지 도발할 수 있나 한번 보자고."

 

 

 움켜잡은 머리칼을 뒤로 잡아 당겨 그 반동으로 열린 입에 딱딱하고 차가운 총을 들이밀었다. 놀라긴 했는지 살짝 당황스러운 빛이 생긴 상에 멈추지 않고 달칵, 레버를 젖혔다. Ready, shot! 장난스러운 음성과 함께 철컥거리며 소름 돋는 소리가 났으나 탄약이 터지는 작은 폭발음은 들리지 않았다. 허억ㅡ, 잔뜩 긴장한 숨을 들이마신 사내의 가슴팍이 불규칙하게 들썩거린다. 표독스럽고 단단했던 얼굴에 점점 금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게 무섭긴 하지? 이제야 재미를 느낀 리에프가 연속으로 두번을 더 방아쇠를 잡아 당겼다. 철컥 철컥. 하지만 이번에도 폭발음은 들리지 않았다. 사내는 몸 전체로 숨을 쉬듯 전신을 꼴사납게 헐떡거렸다. 잔뜩 날이 섰었던 눈은 맥이 풀린 듯 갈피를 잃고 두려움에 점점 먹혀 들어가고 있었다.

 

 

 "나도 총알이 어디에 몇 발이나 들어 있는지 몰라."

 "허억, 윽, 으읍……."

 "당신 운이 좋으면 목숨을 구걸할 때까지 살아 있을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목구멍이 터져 죽겠지."

 "………."

 "빨리 애원하는 게 나을걸. 심장을 관통당하면 깔끔하게 즉사라도 하지, 목구멍이 터지면 당신 피비린내에 질식해서 뒤진다고."

 

 

 흐으, 으……. 간청하는 방법을 모르는지 사내는 그저 쉴새없이 떨리는 몸으로 리에프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덜덜 떨리는 턱 때문에 입 안의 총구과 이가 닿아 딱딱거리는 불쌍한 소리를 냈다. 힘겹게 손을 들어 총을 빼내려는 모습에 곧바로 방아쇠를 당기자 철컥거리는 소리와 동시에 사내가 또 한번 큰 들숨을 먹었다. 흐으, 윽……. 구강을 가득 채운 권총 때문에 입술 끝에서 투명한 타액이 질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어라, 순간 든 생각에 리에프는 계속 눈높이를 맞추던 다리를 펴고 일어나 사내를 내려다 보았다. 장난스레 웃으며 총을 고간에 위치시키고 사내의 머리통을 자신 쪽으로 밀어 당기자 포르노에서나 보던 구강 성교의 행위와 비슷한 꼴이 되었다. 두 눈을 질끈 감고 권총을 물고 있는 모습이 영락 없는 블로우잡이다. 손에 쥔 무기를 천천히 앞 뒤로 움직이자 타액이 총 기둥 위에 좀 더 넓은 모양으로 퍼졌다. 사내도 지금 어떤 상황을 연출시키고 있는지 아는 듯 수치심에 괴로운 표정이었다.

 

 

 "좆 물고 있는 것 같아."

 "………."

 "와, 이거 어쩌지. 나 좀 흥분한 것 같은데. 진짜로 물려줄까?"

 

 

 조금은 경박스러울 정도로 터지는 웃음 소리가 조용한 공간을 시끄럽게 했다. 그만큼 하이바 리에프는 이 상황에 쾌락보다 더한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당신, 이름이 뭐야? 안 가르쳐주려나. 손가락에 걸린 방아쇠에 괜히 한번 더 힘을 주었다. 역시나 폭발음은 들리지 않았고 사내는 다급하게 뭉게진 발음으로 첫 대답을 했다. 쿠,로오, 테츠로……. 그 목소리에 느리게 총을 빼내어주자 모든 힘이 빠진 듯 사내의 상체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휘청였다. 쿠로오, 라고 했던가. 리에프는 쿠로오가 다시 자세를 잡기도 전 식은땀이 맺힌 그의 이마에 총구를 대고 마지막 방아쇠를 당겼다. 철컥. 여전히 발사되지 않는 총탄. 어라ㅡ, 빈 총이었네. 어린 아이 같이 해맑은 미소가 그려진 리에프의 얼굴과 달리 쿠로오는 얼이 나가 공허한 표정이었다. 두려움을 배신당한 분노. 긴장 뒤에 몰아쳐오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그가 큰 소리를 냈다. 너, 이, 개자식……! 그러나 성이 난 음성은 뒷 목을 내려친 리에프의 손에 끝까지 이어지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운 좋네, 쿠로씨. 끝까지 살아남다니 말야."

 

 

 

 즐거운 목소리로 뱉은 문장과 달리, 종이 위로 상황을 정리하던 리에프의 손은 망설임 없이 '전원 사망'이라는 글자를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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